인화원에서 넘긴 이틀의 페이지 — LG Aimers 9기 AI 해커톤 현장을 읽다 | DAKER 커뮤니티

좋은 책은 표지를 넘기기 전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목의 글꼴, 뒷날개에 적힌 한 줄,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 같은 것들이 본문보다 먼저 말을 걸어오지요. 오늘은 책 대신 사진 네 장을 펼쳐 놓고, 지난 9월 19일과 20일 LG인화원에서 열린 LG Aimers 9기 AI 해커톤을 한 장씩 넘겨 보려 합니다. 데이콘이 운영을 맡았던 행사라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사진들입니다.
표지 — 복도에 선 세 장의 배너

첫 장은 붉은 벽돌 벽 앞에 나란히 선 배너 세 장입니다. 주황과 보라가 섞인 곡선 위에 “LG Aimers 9기 AI Hackathon”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그 아래로 일시 2026년 9월 19일~20일, 장소 LG인화원이 이어집니다. 맨 아래에는 이 행사를 함께 만든 이름들이 차례로 놓여 있습니다. 주최 LG AI연구원, 후원 고용노동부와 대한상공회의소, 운영 한경닷컴과 DACON입니다. 오른쪽 배너에는 커다란 보라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서, 표지이면서 동시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라는 첫 문장처럼 읽혔습니다.
저는 책을 사면 차례부터 천천히 읽는 편인데, 가장 왼쪽 배너가 꼭 그 차례 같았습니다. 시간표에 적힌 첫날(토요일)은 이른 아침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모여 인원을 확인하는 칸으로 시작합니다. 인화원으로 옮겨 10시에 연암홀에서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13시부터 18시까지, 저녁을 먹고 다시 19시부터 22시까지 교육장 305·307·308·309호에서 해커톤이 이어집니다. 둘째 날(일요일)은 9시부터 11시까지 마지막 해커톤 시간이 있고, 칸 안에 “11시 대회 종료”라는 붉은 글씨가 따로 적혀 있습니다. 이어서 11시부터 12시까지 Top10 팀의 코드와 발표자료 제출, 13시부터 14시 30분까지 상위 5팀 발표평가, 14시 50분부터 16시까지 수상팀 최종 발표 및 시상식이 연암홀에서 열리는 순서입니다.
차례를 읽다가 눈이 오래 머문 곳은 오른쪽 열이었습니다. 해커톤 칸 옆에 취업 컨설팅, AI 역량 검사, 퍼스널 컬러 같은 프로그램이 첫날 오후와 저녁에 걸쳐 남촌홀에 따로 잡혀 있고, 둘째 날 오전과 오후에는 채용박람회가 함께 열린다고 적혀 있습니다. 대회라는 본문 옆에 “그다음”을 위한 각주를 나란히 달아 둔 셈입니다. 점수를 겨루는 이틀이 누군가에게는 다음 일을 찾는 이틀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일정표가 조용히 말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1장 — 아직 아무도 앉지 않은 객석

두 번째 사진은 대강당입니다. 줄지어 놓인 붉은 갈색 의자들이 모두 비어 있고, 정면 스크린에만 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가운데에 “LG Aimers 9기 AI Hackathon”, 왼쪽에 LG AI Research, 오른쪽에 LG TWINS 로고가 보입니다. 화면 곳곳에는 공을 던지는 투수의 실루엣과 야구공의 붉은 실밥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AI 해커톤의 무대를 야구장처럼 꾸민 것이지요.
저는 이 사진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책으로 치면 본문이 시작되기 직전의 빈 페이지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이 객석이 채워지고 무대 위에서 누군가 자기 팀의 이틀을 설명하게 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텅 빈 공간이 오히려 가장 많은 것을 예고한다는 사실이, 좋은 소설의 첫 장면과 닮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2장 — 노트북 불빛이 켜진 교육장

세 번째 장에서 비로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천장이 낮은 교육장에 테이블이 몇 개의 섬처럼 놓여 있고, 참가자들이 둘러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대부분 등에 붉은 숫자 9가 새겨진 흰 야구 유니폼 차림입니다. 9기라는 숫자를 등번호로 달고 앉은 모습이, 무대에 그려져 있던 투수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앞쪽 스크린에는 순위표로 보이는 화면이 떠 있고, 책상 위에는 물병과 음료 캔, 충전 케이블이 뒤엉켜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 제가 곱씹게 된 것은 화면을 향한 자세였습니다.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화면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해커톤의 시간은 대개 이렇게 조용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멀리서 보면 모두 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저마다 다른 문장을 고쳐 쓰는 중이지요. 일정표에 적힌 해커톤 칸을 모두 더하면 첫날 5시간과 3시간, 둘째 날 2시간입니다. 길다고도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시간이 이 방 안에서 한 줄씩 채워졌을 것입니다.
3장 — 창가의 소나무와 긴 식탁

마지막 사진은 식당입니다. 햇빛이 넉넉하게 들어오는 넓은 공간에 긴 식탁이 이어져 있고, 같은 흰 유니폼을 입은 참가자들이 나란히 앉아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통창 밖으로는 가지를 넓게 펼친 소나무와 초록 숲이 보입니다. 교육장의 모니터 불빛과는 전혀 다른 온도의 장면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긴장감 넘치는 장 사이에 숨을 고르게 해 주는 짧은 장이 끼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장을 좋아합니다. 이야기의 속도를 늦추는 대신, 등장인물들이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사진이 제게는 그런 장이었습니다. 순위표 앞에서는 경쟁자였을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한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해커톤이라는 이야기가 결국 사람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책을 덮으며
사진 네 장으로는 누가 어떤 모델을 만들었는지, 어떤 팀이 무대에 올랐고 누가 상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도 그런 이야기는 적지 않았습니다. 대신 표지와 차례, 빈 객석, 노트북 앞의 뒷모습, 식탁의 햇빛이 남았습니다. 저는 어쩌면 그쪽이 이 이틀을 더 정직하게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정표의 마지막 칸에는 “16:00 인화원 → 잠실 종합운동장”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모인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셈입니다. 그런데 좋은 책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고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등에 9를 달고 이틀을 보낸 분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음 장을 이어 쓰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 다음 장을 데이커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를 조용히 기다려 보겠습니다.